고운실 칼럼니스트
지인 박미량 선생이 보내준 여름선물. 사진=고운실 칼럼니스트
우리 집은 다른 집에 비해 앞마당 텃밭이 넓었다. 뿐만 아니라 뒷켠의 장독대가 있는곳에도 여러 가지 여름을 견딜 야채들 틈에 가장 기다려지는 여름의 열매는 단연 참외였다. 텃밭에서 따온 참외는 시원한 수돗물에 담가 두었다가 껍질을 벗겨 한입 베어 물면 반찬 투정을 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냉장고가 크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참외는 늘 ‘순식간에 사라지는 보물’이었다.
밭에서 따오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그 신기한 속도는, 어쩌면 온 가족이 동시에 참외를 기다렸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전 친구와 통화를 하다 참외 이야기를 했더니 이갈이 할 무렵 껍질째 먹다가 이가 빠져버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이를 지붕 위로 던지며 “새 이빨이 튼튼하게 나길” 소망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단순한 과일 인줄 알았는데 친구 곁에 여름의 웃음과 추억을 품은 삶의 풍경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퇴근길에 지나는 시장의 골목 과일가게 한켠에 놓인 노란 참외에서 여름이 저물어가는 냄새가 난다.
■ 참외 이야기
참외는 우리 민족의 여름을 상징하는 과일이다. 고려 시대에 이미 기록이 남아 있고, 조선 시대에는 궁중의 여름 진상품으로 올랐다. 《동의보감》에 참외의 효능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몸속 열을 내려주고 갈증을 해소하며, 황달, 소변을 잘 나오게 하는 약재로 언급된다. 무더위로 지친 몸의 불균형을 다스리는 데 적합한 과일인 셈이다. 특히 참외 꼭지(瓜蒂, 과체)는 독특한 용도로 쓰였다. 담이나 체기가 가슴에 맺혔을 때 토하게 하여 막힌 기운을 풀어내는 응급약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과육은 달고 시원하지만, 꼭지는 쓰고 강한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삶도 그렇듯 ‘달콤함 뒤에 쓴맛이 함께 존재한다’는 은유를 전해준다.
현대 영양학적으로도 참외는 여름 건강에 꼭 맞는 과일이다. 90% 이상이 수분으로 이루어져 갈증을 해소하고, 칼륨이 풍부해 몸의 부종을 완화한다. 또한 비타민 C와 베타카로틴이 풍부해 햇볕에 지친 피부 회복과 면역력 증진에 도움을 준다. 씨앗에는 기름 성분이 있어 장을 부드럽게 하고 소화를 도와줌으로 자연이 준 완벽한 보약이다.
■ 치유 레시피
참외는 그 자체로도 맛있지만, 조금만 변주하면 특별한 치유 음식이 된다.
①참외 스무디
[재료] (2인분 기준)
참외 1개, 플레인 요거트 200ml, 얼음 1컵(약 8~10개), 꿀 또는 올리고당 1큰술,
레몬즙 1작은술
[만드는 법]
•참외는 껍질과 씨를 제거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믹서기에 참외, 요거트, 얼음, 꿀을 넣고 곱게 간다.
•기호에 따라 레몬즙을 더해 상큼한 맛을 낸다.
•컵에 담아 바로 즐기면, 마치 여름의 마지막 햇살을 마시는 듯한 청량감이 퍼진다. 참외는 ‘먹는 음식’이면서 동시에 ‘여름을 마시는 치유 한 그릇’이 된다.”
■ 참외 냉채
[재료] (2인분 기준)
참외 1개(약 300g), 초간장 2큰술(간장 1.5큰술+식초 0.5큰술+물 1큰술+설탕 1작은술), 고춧가루 1작은술, 식초 1큰술(선택), 소금 약간, 다진 파 1큰술, 다진 마늘 0.5작은술, 통깨 1작은술
[만드는 법]
•참외는 껍질과 씨를 제거한 뒤 오이처럼 길게 채 썬다.
•초간장에 고춧가루, 다진 파·마늘을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채 썬 참외에 양념장을 넣어 가볍게 버무린 뒤,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통깨를 뿌린다. 시원하게 즐기고 싶다면 냉장고에 10분 정도 두었다가 꺼내면 더욱 맛있다. 참외 냉채는 씹는 즐거움과 함께 여름을 마시는 듯한 청량감을 선사한다.
한 시인은 “음식은 단순한 배고픔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억을 이어주는 다리”라고 했다. 참외 레시피 속에는 단순한 맛을 넘어선, 가족과 계절, 그리고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숨어 있다.
■ 여름의 작별 인사
철학자 몽테뉴는 “인생은 계절처럼 흘러간다. 그러나 계절마다 남긴 향은 오래도록 기억된다”고 했다. 참외의 달콤함은 여름의 끝자락에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인사다. 이제 곧 가을이 문 앞에 다가오겠지만, 참외는 여름이 남긴 은은한 작별 인사로 우리 곁에 머문다. 한입 베어 물면 퍼지는 향은 뜨거웠던 여름의 햇살을 닮았고, 그 시절의 추억을 불러낸다. 계절은 떠나가도, 참외가 남긴 노란 햇살의 기억은 오래도록 우리의 마음과 식탁에 자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계절의 문턱에서, 여름의 향기를 떠올리며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