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실 칼럼니스트
시장에 파는 호박이 탐스럽다. 사진=고운실 칼럼니스트
■ 솥뚜껑을 열면 피어오르는 위로
신경 쓰이는 일이 이어져 마음이 잔뜩 무거웠던 날, 밥 한 숟가락조차 넘기기 힘들었다. 결국 호박죽을 배달시켜 뚜껑을 열었다. 노란 속살이 풀려내린 국물이 뭉근히 피어오르며 나를 감싸 안았다. ‘이 부드러움에 마음을 맡겨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에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을 뜨다 거울을 보니, 어느새 굳었던 표정이 풀려 있었다. 그 묘한 웃음을 안고 퇴근길에 걸어서 전철역으로 향하는 길, 시장 골목을 지나며 보니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관심을 가지니 호박씨 기름을 짜는 작은 방앗간이 있다는 걸 몰랐다. 고소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이맘 때 쯤이면 우리집 부엌에서 호박범벅을 벅벅 긁던 쇠주걱 소리! “솥뚜껑을 열면 함께 피어오르던 밥 냄새.” 갓 쪄낸 호박잎의 푸르름과 된장 향기가 숨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는 보리밥에 호박잎 때문인지 남동생들은 연속으로 붕붕 가락이 울려 나오면 서로 쳐다보며 웃었었다.
■ 행운과 보호를 품은 호박 이야기
우리의 일상과 추억을 달래주는 식물인데 ‘먹을거리’로만 보기엔 아까운, 전설과 약속, 그리고 치유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한국의 민담에는 호박이 다산(多産)과 풍요를 가져오는 신령한 식물로 등장한다. 오래전 농촌에서는 마을 입구에 호박을 심으면 악귀가 마을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믿었다. 커다란 호박이 대문 앞에 넝쿨째 굴러오는 꿈을 꾸면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고 여겼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다”는 속담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기대하지 못한 선물이 주어질 때, 우리는 지금도 이 말을 쓴다.
중국에서는 호박이 변신과 재생의 상징이다. 백사(白蛇)가 인간으로 변신하는 설화에서 호박이 신비로운 매개체로 등장하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호박이 ‘악령을 쫓는 등불’이 된다. 할로윈 때 ‘잭오랜턴(호박등불)’으로 변신한 호박은 밤을 밝히며,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수호자가 된다. 이처럼 호박은 문화와 시대를 초월해 ‘보호와 풍요’를 전하는 상징이었다.
■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노란 빛깔
호박은 콩·옥수수와 함께 세계 3대 장수 식품 중 하나다. 저칼로리(100g당 26kcal) 이면서도, 비타민 A·C·E, 칼륨, 식이섬유, 베타카로틴이 풍부하다. 호박씨 오일은 보습·항염 효과가 있어 화장품 원료로 쓰이고, 남성 건강과 전립선 질환 예방에도 좋다는 연구 결과 때문인지 호박은 열매, 꽃, 잎, 줄기, 씨까지 버릴 것이 없는 ‘완전 치유 식물’이다.
한방에서는 호박을 “맛은 달고, 성질은 평(平)하며 따뜻하고 독이 없다.”라고 한다. 특히 늙은호박을 달여 만든 ‘호박즙’은 산모의 부종을 줄이는 대표 산후 음식이었다. 호박은 이런 효과 때문인지 산업적 가치가 이어져 식품산업, 뷰티·헬스 산업, 한방·건강기능식품으로 이어지는 추세이기도 하다.
■ 밥상 위의 부드러운 치유의 식탁
①달콤한 호박 고로켓
[재료] (2인분)
단호박 1/4통 (약 200g),감자 1/2개 (선택),다진 양파 2큰술, 버터 1/2 큰술
소금 1/4 작은술, 후추 약간, 밀가루 1/4컵, 달걀 1개, 빵가루 1/2컵
[만드는 법]
• 단호박을 씨 제거 후 쪄서 곱게 으깨고 이때 감자도 같이 찐다.
• 팬에 버터 두르고 양파 볶다가 으깬 호박과 감자 넣어 간한다.
• 한 스푼씩 덜어 4~5개 정도로 동글게 빚고, 밀가루–달걀–빵가루 순으로 묻혀 튀김옷 입힌다. 170℃ 기름에 3분가량 노릇하게 튀기면 완성된다.
② 호박잎 스프
[재료] (2인분)
어린 호박잎 5장, 감자 1/2개, 다진 양파 2큰술, 마늘 1/2쪽, 올리브오일 1/2 큰술
채소육수 1컵, 우유 또는 두유 1/2컵
[만드는 법]
• 호박잎 잔털 제거 후 깨끗이 씻는다.
• 올리브오일에 양파·마늘 볶다가 감자 넣고 육수 부어 끓인다.
• 감자가 익으면 호박잎 넣고 2~3분 더 끓인 후, 믹서로 곱게 갈고, 우유(또는 두유) 넣어 부드럽게 한 번 더 끓인다.
• 소금·후추로 간 맞추고, 호박씨와 올리브오일 몇 방울로 마무리한다.
작은 고로켓 하나에도 하루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린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유는 바삭한 웃음이다.’ 오늘은 이 고로켓을 건네 보자. 호박의 은은한 단맛이 마음속 오래된 고민까지 풀어줄지 모른다. 그 곁에 부드러운 호박잎 스프 한 그릇을添하면, 하루의 독소가 조용히 씻겨 내려간다. 푸른 호박잎이 우유와 만나 초록빛 위로가 되어 돌아온다. ‘따뜻한 한 그릇은 때론 모든 해답이 된다.’ 심란한 밤, 마음을 다독일 위로가 필요하다면 오늘은 이 스프를 권한다.
③단호박 닭볶음 – 단맛으로 감싼 고기의 풍미
[재료] (2인분)
닭다리살 200g (닭가슴살도 가능), 단호박 1/4통 (약 200g), 양파 1/4개 (채썬 것)
마늘 2쪽 (다진 것), 올리브오일 1큰술, 간장 1큰술, 꿀 1큰술, 화이트와인(또는 맛술) 1큰술, 로즈마리·타임 약간 (생 또는 건조 허브), 소금·후추 약간
[만드는 법]
• 단호박은 씨를 제거하고 껍질째 큼직하게 썰어준다.
• 닭다리살은 한 입 크기로 썰어 소금·후추로 가볍게 밑간해 둔다. 팬에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볶아 향을 낸 뒤 닭고기를 넣어 겉이 노릇할 때까지 굽는다.
• 단호박과 양파를 넣고 함께 볶다가 화이트와인(또는 맛술)을 넣어 잡내를 없애고 단호박이 살짝 부드러워질 때까지 볶는다. 간장, 꿀(또는 메이플시럽)을 넣어 닭고기와 단호박에 고르게 스며들게 한다.
• 로즈마리와 타임을 넣어 은은한 허브 향을 입히고, 불을 끈 뒤 뚜껑을 덮어 잠시 뜸을 들인다.
닭고기의 느끼함은 단호박의 은은한 단맛이 부드럽게 잡아준다. 여기에 로즈마리와 타임 같은 서양 허브를 더하면 향긋함까지 어우러져, 몸과 마음을 달래는 한 접시의 치유식이 완성된다. 단호박의 달콤함이 닭고기를 감싸듯, 오늘 하루의 피로도 살며시 덮여갈 것이다. 향긋한 허브 향이 전하는 작은 위로는, 때로 긴 하루를 다독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된다. 오늘, 마음이 허기진 분들께 이 요리를 권하고 싶다.
호박은 따뜻한 기후와 넉넉한 햇살, 그리고 덩굴이 뻗을 공간만 있다면 주렁주렁 햇빛을 향해 자란다. 그리고 그 존재만으로도 오래도록 누군가의 힘이 된다. 오늘 저녁, 문득 호박잎 쌈이 먹고 싶다. 쌀밥 대신 보리밥을 지어, 갓 찐 호박잎과 호박꽃이 전하는 ‘사랑의 용기’, 그리고 호박잎의 해독력을 함께 느껴보고 싶다. 몸은 한결 가벼워지고, 마음은 따뜻해질 것이다. 어쩌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는” 순간이 내일 아침 문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